뿔이 끼었다 — 대장괘 상육(上六)으로 읽는 이란 전쟁과 한국의 선택
1953년, 북한 조종사 노금석이 미그기를 몰고 남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는 10만 달러와 자유를 얻었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서 동료 5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의 선택은 옳은가, 그른가?" "그는 동료를 배신한 이기주의자인가, 자유를 찾은 영웅인가?"
하지만 3,000년 전의 텍스트 주역(周易)과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은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도덕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무망지재(无妄之災)’, 즉 의도치 않게 발생한 자연재해와 같기 때문입니다.
주역 25번째 괘 천뢰무망(天雷无妄)의 세 번째 효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혹자가 소를 매어 놓았는데, 지나가던 나그네가 얻는 것이, 읍 사람에게는 재앙이 된다."
나그네(노금석)는 소(자유)가 필요해서 가져갔을 뿐입니다. 읍 사람(동료)을 해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읍 사람(동료) 역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소가 묶여 있던 그 자리에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그네는 횡재를 했고, 읍 사람은 벼락을 맞았습니다.
주역은 이 부조리한 상황을 두고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행인을 도둑이라 욕하지도, 읍인을 어리석다 비웃지도 않습니다. 그저 "뜻하지 않은(无妄) 재앙"이라고 건조하게 서술할 뿐입니다.
하늘(天) 아래에서 천둥(雷)이 칩니다. 이것이 무망괘의 형상입니다. 천둥과 번개는 "저 나무는 착하니까 피하고, 저 바위는 나쁘니까 때려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위차와 습도라는 조건이 맞으면 그냥 떨어집니다.
노금석의 탈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존 본능'이라는 에너지와 '남쪽의 틈'이라는 조건이 맞물려 스파크가 튀었을 뿐입니다. 그 스파크의 파편이 튀어 동료들이 죽은 것은 비극이지만, 거기에는 노금석의 '살의(殺意)'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비인격적인 인과(Impersonal Causality)의 결과입니다.
💡 에디터의 코멘트: 우리가 겪는 고통 중 많은 부분은 '내 탓'도 '남 탓'도 아닌 그저 일어난 일들입니다. 지난 칼럼 [[회복탄력성]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당신에게: 진짜 회복을 위한 '숨쉬기' 철학]에서 다룬 '이미 뱉은 숨(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해 보시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연기(緣起)’의 실체입니다. 연기법은 "착하게 살면 복받는다"는 동화 같은 권선징악이 아닙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냉혹한 물리학입니다.
나비가 날갯짓을 했고(조건 A), 지구 반대편에 태풍이 불었습니다(결과 B). 나비에게는 죄가 없고, 태풍에 쓸려간 집에도 죄가 없습니다. 노금석이라는 나비가 날았고, 북한 체제라는 기압골이 반응하여, 동료들의 처형이라는 태풍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거대한 그물망 속에서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조건에 따라 반응하고 흩어지는 현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모든 비극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찾으려 애씁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욕해야 이 부조리를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망'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더 서늘한 진실을 직시하라고 요구합니다.
"너의 횡재도 너의 잘남 때문이 아니요, 타인의 재앙도 그의 죄 때문이 아니다."
케네스 로우(노금석)가 미국에서 누린 70년의 평화는 하늘이 그에게 상을 준 것이 아닙니다. 동료들의 죽음 또한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된 것(Being so)’**입니다.
그러니 이 비극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심판이나 단죄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를 보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듯,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의 유한함을 그저 ‘있는 그대로(如如)’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떠났고, 마을 사람은 재앙을 당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땅에는 천둥이 쳤습니다. 그뿐입니다. 그곳에 슬픔은 있어도, 죄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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